깨달음을 타고 오는 감사
  식탁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아이에게 아버지가 꾸중하며 말합니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생각해 봐. 하루에 한 끼도 못 먹고 깨끗하지 못한 물을 마셔서 병도 많고 학교에서 공부도 제대로 못 하잖아. 거기에 비하면 너는 이렇게 넓은 집에서 매끼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잖아. 너는 감사해야 돼” 이런 감사를 상대적 감사라고 합니다. 
  상대적인 감사는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감사는 나보다 더 나은 조건의 사람을 보면 금방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서 감사하라고 충고하는 아버지에게 “아빠, 우리 반에는 재벌 아들이 있는데 입는 옷마다 명품이고 가방도 굉장히 비싸고 벌써 주식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래. 나는 거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아버지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절대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했던 것이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하박국서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라고 했던 고백이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손양원목사님이 순교당한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감사 십계명을 외쳤던 것도 그렇고, 교통사고로 수십 번의 수술에도 감사를 잊지 않았던 이지선 자매의 감사도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물론 이렇게 절대적인 감사를 한 이들도 매순간 이렇게 감사만 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심각한 상황 속에서 애절하게 몸부림도 치고 주님에게 원망을 쏟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감사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분노와 좌절 가운데 있던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그들 안에 감사의 마음이 회복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감사는 깨달음을 타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엘리야가 감사를 잃고 절망하여 죽여 달라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를 어떻게 일으키셨나요? 어쩌면 감사를 잃은 사람이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인가 화끈하고 선명한 일이 보거나 경험하면 감사가 생길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십니다. 굉장한 일을 보여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방식이 아니라 조용히 찾아와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그를 격려하십니다. 물론 엘리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다음 벌떡 일어섭니다. 이 세미한 소리가 엘리야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겁니다. 
  내려놓지 못해서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 문제는 내려놓아도 된다는 것을, 내려놓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감사가 임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잃었던 감사가 회복되기도 합니다. 역시 감사는 깨달음을 타고 옵니다. 
  그러고 보니 감사일기를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매일 감사의 내용을 글로 적는 시간은 깨달음을 회복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감사의 일기가 쌓이는 것만큼 감사의 고백도 넘쳐나지 않을까요?